이감 (조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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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이감은 1516년에 태어나 1583년에 사망한 조선 중기의 문신이다. 중종 때 문과에 급제하여 승문원 권지를 시작으로 홍문관, 사간원 등에서 관직을 역임하며 《중종실록》 편찬에 참여했다. 명종 대에는 윤원형, 윤원로 등과 결탁하여 사림파를 공격했으며, 이량의 심복이 되어 경기도 관찰사 등을 지냈다. 이후 탄핵을 받아 유배되었고, 말년에는 풀려나 광주에서 사망했다. 그의 행적은 권력 투쟁에 매몰된 조선 중기 정치 상황을 보여주는 사례로 평가받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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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감 (조선) - [인물]에 관한 문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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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물 정보 | |
이름 | 이감 (李戡) 또는 이감(李勘) |
출생일 | 1516년 10월 27일 |
출생지 | 조선 강원도 강릉부 |
사망지 | 조선 경기도 광주군 낙생면 대리장동(현, 성남시 분당구 대장동) 아랫장토리 |
사망일 | 1583년 음력 윤달 2월 19일 (66세) |
사망 원인 | 병사 |
거주지 | 조선 |
국적 | 조선 |
별명 | 다른 이름은 감(勘), 초명은 언소(彦昭), 자는 언신(彦愼) 또는 언신(彦信) |
학력 | 1543년(중종 38) 식년문과 을과 급제 |
직업 | 문신, 정치인, 작가, 외교관, 교육자 |
종교 | 유교(성리학) |
배우자 | 풍천임씨, 예천윤씨 |
자녀 | 이성헌, 이희헌, 이씨, 이씨, 이유헌, 이의헌, 이씨 |
부모 | 이광식, 함안이씨 |
친척 | 이계변(형), 이전(동생), 이용(동생), 이지방(할아버지), 이복남(종손), 임권(장인), 임유겸(처조부), 이준헌(조카), 이승헌(조카), 윤근수(사돈), 윤두수(사돈), 광원군 (사돈), 윤지임(사돈), 윤원형(사돈) |
군인 정보 | |
이름 | 이감 (李戡) 또는 이감(李勘) |
생애 | 1516년 10월 27일 ~ 1583년 음력 윤달 2월 19일 |
별명 | 초명은 언소(彦昭), 자는 언신(彦信) 또는 언신(彦愼) |
태어난 곳 | 조선 강원도 명주군 |
죽은 곳 | 조선 한성부 |
복무 | 조선 육군 |
최종 계급 | 함경도도순변사 종사관, 병조참판, 대호군 |
부대 | 조선 육군 |
기타 이력 | 1543년(중종 38) 식넌문과 을과 급제 |
2. 생애
이감은 1516년(중종 10) 10월 27일 강원도 강릉에서 태어났다. 할아버지는 병마절도사를 지낸 이지방이고, 아버지는 병조참판 이광식이며, 어머니는 함안 이씨로 평안도관찰사를 지낸 정국공신 양간공 안재 이세응의 둘째 딸이다.[2]
어려서 성리학을 공부하였으나 스승의 이름은 전해지지 않는다. 어릴 적 이름은 언소(彦昭)였으나[3], 뒤에 감으로 개명하였다. 자는 언신(彦信), 언신(彦愼)이다. 이중경, 안종도 등과 가깝게 지냈으며, 미암 유희춘과도 교류하였다.
1545년 예문관봉교로 있으면서 중국 명나라에 보내는 자문(咨文)의 글씨를 잘 써서 그해 10월 명나라로부터 칭찬을 받았다. 이어 사간원정언이 되어 윤원형(尹元衡)·윤춘년(尹春年) 등과 결탁, 사류를 공격하는 데 가담하였다. 명종 연간에 정언을 비롯한 삼사(三司)의 관직을 두루 역임하면서 윤원형, 윤원로, 윤춘년 등을 도와 사림파(士林派)를 공격하는데 참여했다.
1546년(명종 1) 4월 사간원정언이 되고, 12월 홍문관 부수찬(副修撰)이 되었다.[5] 1547년(명종 2) 1월 다시 부수찬이 되었으며, 11월 부제학 정언각 등과 함께 봉성군 이완(鳳城君 李岏)의 복작을 비판했다.[5] 1548년(명종 3) 2월 8일 홍문관 부수찬으로 경상좌도 분견어사로 파견되었다.[5] 1550년(명종 5) 홍문관 부수찬, 겨울 비변사 낭청[6], 1551년 홍문관 수찬, 홍문관 교리, 사헌부 지평[6] 등을 역임하였다.
1553년 12월 장흥 부사로 나갔다가 1554년 1월 종성 부사로 나가 변경수비를 맡았다. 1555년 5월 순변사 조광원의 종사관[10], 윤 11월 22일 황해도 관찰사 겸 해주 목사로 부임하였다.
1557년(명종 12년) 명나라에서 순회세자의 세자 책봉 주청사를 파견하자, 우부승지로 원접사의 수행원이 되어 명나라 사신을 접대하였다.[1] 1558년(명종 13) 성절사(聖節使)로 임명되어 연경에 방문, 10월 20일 귀국하여 명나라의 상황을 보고하였다.[1]
皇帝長在西成宮, 建玄極寶殿, 齊蘸不絶, 閣老諸大臣, 相繼進香, 全廢視朝。 且奉天門, 今改爲大朝門, 以御札懸額, 行賀禮於其庭, 百官或立或拜, 或入或出, 班未成行, 卽爲罷散, 朝禮無統, 所見寒心。 閣老嚴嵩, 年今八十三歲, 而長在華盖殿, 威福在手, 生殺惟意。 嵩家在西長安門外, 而人以小皇城目之。 凡官爵高下, 在銀多少, 事雖微細, 非賂不成, 怨讟滔天, 顯然罵詈。 且不封太子者, 嵩以爲不利於聖算而不封云。|황제가 오래 서성궁(西成宮)에 있으며 현극보전(玄極寶殿)을 세우는데, 재초(齋醮)가 끊이지 않고 각로(閣老)와 모든 대신들이 잇달아 진향(進香)하느라 조회(朝會)를 완전히 폐했습니다. 또 봉천문(奉天門)을 지금은 대조문(大朝門)이라고 고쳐 어찰(御札)로 현판을 하고서 뜰에서 하례(賀禮)를 거행하였는데, 백관(百官)이 혹은 섰기도 하고 혹은 절하기도 하며 혹은 들어오기도 하고 혹은 나가기도 하여, 반열이 줄을 이루지 못한 채 곧 파하여 흩어졌는데 조정의 예절이 통기(統紀)가 없어 보기에 한심스러웠습니다. 각로 엄숭(嚴嵩)은 나이가 지금 83세인데 언제나 화개전(華蓋殿)에 있으며 위복(威福)이 그의 손에 달려 있고 생살(生殺)을 그 뜻대로 합니다. 엄숭의 집이 서장안문(西長安門) 밖에 있는데 사람들이 소황성(小皇城)이라고 부릅니다. 무릇 관작의 높음과 낮음이 은(銀)의 다소(多少)에 달려 있고, 아무리 작은 일이라도 뇌물이 아니면 성사되지 않으므로, 원망과 비방이 하늘에 닿아 드러내놓고 욕하고 있었습니다. 또 태자를 봉하지 않고 있는 것은 엄숭이 성산(聖筭)에 불리하다고 생각하여 봉하지 않는 것이라 했습니다.중국어[1]
1559년(명종 14) 4월 5일 경상도 성주를 순행하였다.[11] 경상도관찰사로 재직 중 4월 6일 대마도 도주 종성장(宗盛長)이 왜구가 명나라로 가려 한다는 정보를 보고하였다.
1560년(명종 15) 1월 17일 동지중추부사에 임명되었다. 1561년(명종 16) 1월 동지중추부사, 4월 26일 경기도관찰사에 임명되었다.[13] 그 뒤 명종이 자신의 외숙 윤원형을 견제하기 위한 목적으로 인순왕후의 외삼촌인 이량(李樑)이 등용되어 국정을 전단하자, 윤원형의 편에 있다가 시세에 좇아 이량의 심복이 되었다.
1562년(명종 17년) 병조참판, 그해 4월 3일 승정원도승지를 거쳐 9월 5일 형조참판이 되었다. 1563년(명종 18년) 6월 25일 사헌부대사헌에 기용되었으나 사양하였다. 1563년 초 이량의 아들 이정빈이 이조전랑에 천거됐으나 이량과의 상피제로 유영길을 이조 전랑으로 추천하였다. 그러나 이문형, 허엽, 윤두수 등이 이를 반대했다.
1563년 8월 17일 이량의 사주를 받고 박소립, 이문형(李文馨), 허엽(許曄), 윤두수, 윤근수(尹根秀), 기대승(奇大升), 이산해 등을 탄핵하여 밖으로 내쫓으려 하였으나, 심의겸의 사주를 받은 홍문관부제학 기대항의 역공격을 받는다. 기대승의 친척인 기대항(奇大恒) 등의 역탄핵으로 8월 20일 대호군(大護軍)으로 전임, 삭탈관작되고, 문외출송되었다.[16] 1563년(명종 18년) 10월 10일 충청도 수안에 유배되었다.
1571년(선조 4년) 선조가 대재앙으로 사면령을 내렸으나 양사의 거듭된 반대로 취소되었다. 1581년(선조 14) 재난으로 대사령이 내려지자 그해 6월 석방, 방면되어 경기도 광주로 돌아왔다.[17]
1583년 윤달 음력 2월 19일에 사망하였다.
2. 1. 생애 초기
이감은 1516년(중종 10) 10월 27일 강원도 강릉에서 태어났다. 할아버지는 병마절도사를 지낸 이지방이고, 아버지는 병조참판 이광식이며, 어머니는 함안 이씨로 평안도관찰사를 지낸 정국공신 양간공 안재 이세응의 둘째 딸이다.[2]할아버지 이지방 대에 종2품 벼슬에 올라 가세가 일어섰다. 아버지 이광식과 동생 이전, 이용은 모두 변방의 장수로 활동하였다. 할머니는 청송 심씨로 망세당 심선의 손녀이자, 개국공신 심덕부의 5대손이다.
형 이계변(李繼邊)은 요절하였고, 동생은 이전과 이용으로 무신으로 활동하였으며, 이전은 충장공 이복남의 조부였다. 누이 3명 중 1명은 신호(申濩)에게, 다른 1명은 정종의 왕자 진남군 이종생(鎭南君 李終生)의 5대손이자 계원군 이의(桂原君 李艤)의 손자인 현감 이춘림(李春林)에게 출가했고, 또 다른 1명은 윤사흔의 증손 윤강(尹綱)에게 출가하였다. 그는 문정왕후 및 소윤 윤원형, 윤원로, 윤춘년 일가와 겹사돈이었는데, 고모부 윤확은 윤원형, 윤원로, 윤춘년의 6촌 형이었고, 누이는 윤원형, 윤원로 형제의 형 윤원개의 아들 윤강(尹綱)에게 시집갔다.[2] 외조카딸 중 1명은 이중경의 후처가 되었다.
어려서 성리학을 공부하였으나 스승의 이름은 전해지지 않는다. 어릴 적 이름은 언소(彦昭)였으나[3], 뒤에 감으로 개명하였다. 자는 언신(彦信), 언신(彦愼)이다.
이중경, 안종도 등과 가깝게 지냈으며, 미암 유희춘과도 교류하였다. 무위루(武威樓)에서 미암 유희춘이 그에게 시를 지어 주기도 했다. 유희춘은 그의 동생 이전도 종종 찾았고, 이전은 자신이 임지로 부임할 때 유희춘의 집에 들러 인사를 주고받기도 했다. 사돈이기도 한 윤춘년과도 가깝게 지냈으며, 윤춘년은 이감을 공격하는 인사들을 공격하여 그를 후견하였다.
2. 2. 관료 생활
1545년 예문관봉교로 있으면서 자문 서사관(咨文書寫官)이 되어 중국 명나라에 보내는 자문(咨文)의 글씨를 잘 써서 그해 10월 명나라로부터 칭찬을 받았다. 이어 사간원정언이 되어 윤원형(尹元衡)·윤춘년(尹春年) 등과 결탁, 사류를 공격하는 데 가담하였다.1545년(명종 즉위) 11월 홍문관정자(正字)가 되었다가, 이전에 사관으로 있을 때 사국(史局)에서 들은 동료들의 직언(直言)을 다른 사람에게 누설한 일로 사간원의 탄핵을 받고 체직되었다. 명종 연간에 정언을 비롯한 삼사(三司)의 관직을 두루 역임하면서 원계검(元繼儉), 진복창(陳復昌), 심봉원(沈逢源) 등과 함께 이언적(李彦迪) 등이 유인숙(柳仁淑)과 결탁했다는 이유로 탄핵하는 등, 윤원형(尹元衡), 윤원로, 윤춘년 등을 도와 사림파(士林派)를 공격하는데 참여했다.
이감은 허엽이 이조좌랑이 되었을 때에 자신의 청요직 취임에 반대한 것으로 감정을 갖게 된다. 1553년 9월 허엽의 종가(宗家)가 불에 타서 다시 집을 짓게 되었는데, 이감은 의심스러운 흔적을 찾아내 허엽을 몰아붙였다. 이에 대사헌 윤춘년(尹春年)이 믿고 허엽을 탄핵하려 하였는데, 어떤 사람이 윤춘년에게 ‘허엽이 짓는 것은 종가이다. 의심스러운 흔적을 가지고 논박한다면, 한지원(韓智源)과 심전(沈銓)은 어떻게 할 것인가?’라고 하였다. 윤춘년은 ‘한지원과 심전은 참으로 죄가 있다 하겠거니와, 허엽은 사림의 명망을 받고 있으니 그런 일이 있어서는 안 될 것이다.’라고 하였다. 그 사람이 또 ‘그렇다면 명망이 있는 자만을 다스리고, 사람 축에 끼지도 못할 자들은 그대로 내버려 둔단 말인가?’라고 하니, 윤춘년은 대답을 못했고 허엽은 처벌을 모면하였다.[4]
2. 3. 삼사에서의 활동
1546년(명종 1) 4월 사간원정언이 되고, 12월 홍문관 부수찬(副修撰)이 되었다.[5] 1547년(명종 2) 1월 다시 부수찬이 되었으며, 그해 11월 부제학 정언각, 직제학 원계검(元繼儉) 등과 함께 봉성군 이완(鳳城君 李岏)의 복작을 비판했다.[5] 그해 경연 검토관(檢討官)을 겸하여 경연에 참여하였다.[5] 1548년(명종 3) 2월 8일 홍문관 부수찬으로 경상좌도 분견어사로 파견되었다.[5] 그해 9월 복귀한 뒤 사간원 헌납, 예조 정랑, 1549년 2월 홍문관 부수찬, 3월 수찬을 거쳐 다시 홍문관 교리, 병조 정랑 등을 지냈다.[5]1550년(명종 5) 홍문관 부수찬이 되었다가, 그해 겨울 비변사 낭청이 되었다.[6] 비변사 낭청 재직 중 《비변사 계회도》를 그리고, 신광한에게 기문을 청하였다.[6] 그해 12월 22일 홍문관 수찬이 되었다.[6] 1551년 1월 6일 다시 홍문관 수찬에 임명되었다가 2월 2일 다시 홍문관 교리에 임명되고, 7월 13일 다시 홍문관 교리에 임명되었다.[6] 그해 9월 의주에 성을 쌓을 것을 상소하였다.[6] 3월 21일 다시 홍문관 교리에 임명되고, 5월 27일 사헌부 지평이 되었다.[6]
2. 4. 지방관 및 변경 방어 활동
1553년 12월 장흥 부사로 나갔다가 1554년 1월 종성 부사로 나가 변경수비를 맡았다. 이때 그는 의주성의 수축을 조정에 건의하였지만 받아들여지지 않았다.[7]1555년 5월 아버지 이광식에게 편지를 보내 북쪽 여진족 니마차(亇車) 부락의 호인(胡人) 서응서을귀(鋤應鋤乙貴) 등이 말을 키우고 양식을 비축하며 약탈을 준비했으나, 온성에 쳐들어왔다가 실패한 뒤 쉽게 시도를 못하고 머뭇댄다는 정황을 보고하였다.[9] 그의 편지는 5월 26일 아버지 이광식이 비변사에 보고하였다.
같은 해 5월 순변사 조광원의 종사관에 임명되어, 5월 26일 류중영과 함께 경상도 선산으로 갔다가 성주 관아로 들어왔다.[10]
1555년 윤 11월 22일 황해도 관찰사 겸 해주 목사로 부임하였다.
2. 5. 명나라 사신 방문 및 귀국
1557년(명종 12년) 명나라에서 순회세자의 세자 책봉 주청사를 파견하자, 우부승지로 원접사의 수행원이 되어 명나라 사신을 접대하였다.[1] 1558년 3월 17일 명종의 명으로 세자 책봉 사절을 접견한 사신들을 시상할 때 1자급 승진하였으나, 같은 날 사간원이 전례라 해도 옳지 않다고 비판하여 녹을 주는 일만 취소되고 승진은 유지되었다.[1]1558년(명종 13) 성절사(聖節使)로 임명되어 연경에 방문, 10월 20일 귀국하여 명나라의 상황을 보고하였다.[1]
皇帝長在西成宮, 建玄極寶殿, 齊蘸不絶, 閣老諸大臣, 相繼進香, 全廢視朝。 且奉天門, 今改爲大朝門, 以御札懸額, 行賀禮於其庭, 百官或立或拜, 或入或出, 班未成行, 卽爲罷散, 朝禮無統, 所見寒心。 閣老嚴嵩, 年今八十三歲, 而長在華盖殿, 威福在手, 生殺惟意。 嵩家在西長安門外, 而人以小皇城目之。 凡官爵高下, 在銀多少, 事雖微細, 非賂不成, 怨讟滔天, 顯然罵詈。 且不封太子者, 嵩以爲不利於聖算而不封云。|황제가 오래 서성궁(西成宮)에 있으며 현극보전(玄極寶殿)을 세우는데, 재초(齋醮)가 끊이지 않고 각로(閣老)와 모든 대신들이 잇달아 진향(進香)하느라 조회(朝會)를 완전히 폐했습니다. 또 봉천문(奉天門)을 지금은 대조문(大朝門)이라고 고쳐 어찰(御札)로 현판을 하고서 뜰에서 하례(賀禮)를 거행하였는데, 백관(百官)이 혹은 섰기도 하고 혹은 절하기도 하며 혹은 들어오기도 하고 혹은 나가기도 하여, 반열이 줄을 이루지 못한 채 곧 파하여 흩어졌는데 조정의 예절이 통기(統紀)가 없어 보기에 한심스러웠습니다. 각로 엄숭(嚴嵩)은 나이가 지금 83세인데 언제나 화개전(華蓋殿)에 있으며 위복(威福)이 그의 손에 달려 있고 생살(生殺)을 그 뜻대로 합니다. 엄숭의 집이 서장안문(西長安門) 밖에 있는데 사람들이 소황성(小皇城)이라고 부릅니다. 무릇 관작의 높음과 낮음이 은(銀)의 다소(多少)에 달려 있고, 아무리 작은 일이라도 뇌물이 아니면 성사되지 않으므로, 원망과 비방이 하늘에 닿아 드러내놓고 욕하고 있었습니다. 또 태자를 봉하지 않고 있는 것은 엄숭이 성산(聖筭)에 불리하다고 생각하여 봉하지 않는 것이라 했습니다.중국어[1]
2. 6. 지방관 생활
1559년(명종 14) 4월 5일 경상도 성주를 순행하였다.[11] 경상도관찰사로 재직 중 1559년(명종 14) 4월 6일 대마도 도주 종성장(宗盛長)이 왜구가 명나라로 가려 한다는 정보를 보고하였다. 6월 18일에는 흉년을 들어 구휼을 청하는 상소를 올렸으며, 함창(지금의 상주)사람 권찬, 권소 등 효행과 우애가 있는 인물들을 천거하여 시상을 상언하였다.경상감사 재직 중 퇴계 이황을 찾아 깎듯이 대하였다. 후일 학봉 김성일도 그가 "경상도 방백(方伯)으로 있으면서 서당으로 찾아오자 선생께서 그를 만나 보았다.[12]"고 하였다.
1560년(명종 15) 1월 17일 동지중추부사에 임명되었다. 그해 11월 6일 경기도관찰사에 임명되었으나 바로 부임하지 못했다.
1561년(명종 16) 1월 동지중추부사, 1561년 4월 26일 경기도관찰사로 임명되었다.[13] 이어 겸 경기도병마수군절도사를 겸임했다. 5월 21일 사헌부로부터 추향이 바르지 못하다는 이유로 파직을 청하였으나 명종이 이를 거부하였다. 그 뒤 명종이 자신의 외숙 윤원형을 견제하기 위한 목적으로 인순왕후의 외삼촌인 이량(李樑)이 등용되어 국정을 전단하자, 윤원형의 편에 있다가 시세에 좇아 이량의 심복이 되었다. 1561년 5월 22일 대사헌 김홍윤(金弘胤) 등이 윤원형의 사주를 받고 그의 파직을 청하였으나 명종이 듣지 않았다.[14] 그해 11월 8일 동지중추부사로 전직되었다. 또한 오위도총부 부총관을 겸직했다.
그는 윤원형의 인척이었으나 명종이 윤원형을 견제할 목적으로 인순왕후의 외삼촌 이량을 등용하자, 이량의 편에 가담했다. 윤원형은 사헌부를 사주하여 이감을 공격했다.
이때 이량은 사림을 공격하였는데, 이감의 당파인 이량(李樑)이 사림(士林)들을 모함하자, 이황은 당 위의 한 곳을 손가락으로 가리키면서 “이곳이 아무개가 그날 앉았던 곳이다. 지척에서 마주 보았는데, 어찌 그의 악함이 이 지경에 이를 줄이야 알았겠는가.” 하면서, 오래도록 탄식하였다.[15]
2. 7. 몰락과 유배
1562년(명종 17년) 병조참판이 되었다가, 그해 4월 3일 승정원도승지가 되었으며, 중종의 능침을 고양 서삼릉 근처에서 광주 삼성리(현, 서울특별시 강남구 삼성동)로 이장할 때, 한효우(韓孝友) 등과 함께 재궁시위집사(梓宮侍衛執事)가 되어 이장을 보조한 공로로 한품계 승진했다. 9월 5일 형조참판이 되었다.그 뒤 공조참판을 거쳐 1563년(명종 18년) 6월 25일 사헌부대사헌에 기용되자, 6월 27일 그는 스스로 사양하였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1563년 초 이량의 아들 이정빈이 이조전랑에 천거됐으나 이량과의 상피제로 이정빈 대신 그의 친구 유영길을 이조 전랑으로 추천하였다. 그러나 이문형, 허엽, 윤두수 등이 이를 반대했다.
1563년 8월 17일 그는 이량의 사주를 받고 집의 이영(李翎), 장령 황삼성(黃三省) 등과 함께, 박소립, 이문형(李文馨), 허엽(許曄), 윤두수, 윤근수(尹根秀), 기대승(奇大升), 이산해 등을 부박하게 선동한다는 이유로 탄핵하여 밖으로 내쫓으면서 다시 한번 사림에게 대대적인 타격을 가하려 하였다. 그러나 이를 막으려는 심의겸(沈義謙)의 사주를 받은 홍문관부제학 기대항의 역공격을 받는다. 8월 18일 기대항의 탄핵을 시작으로, 양사의 탄핵을 받았다. 기대승의 친척인 기대항(奇大恒) 등의 역탄핵으로 그해 8월 20일 대호군(大護軍)으로 전임되었다. 같은 날 기대항 등의 탄핵을 받고 삭탈관작되고, 바로 문외출송되었다.[16] 그러나 이후 양사에서 여러 차례 비판, 탄핵을 받고 1563년(명종 18년) 10월 10일 충청도 수안에 유배되었다.
2. 8. 석방과 죽음
1571년(선조 4년) 선조가 대재앙으로 사면령을 내렸으나 양사의 거듭된 반대로 취소되었다. 1581년(선조 14) 재난으로 대사령이 내려지자 양사의 반대가 있었으나 그해 6월 석방, 방면되어 경기도 광주로 돌아왔다.[17] 그해 11월 4일부터 사림파 양사에서 그의 석방에 반대하는 합계가 올라왔지만 선조가 이를 듣지 않았다.1583년 윤달 음력 2월 19일에 사망하였다.
3. 가계
관계 | 이름 | 출생 - 사망 | 비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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증조부 | 이징(李徵) | ? - 1459년 | 세조 때 공조참의 역임 |
증조모 | 고성 이씨(固城李氏) | ? - ? | 이수(李脩)의 딸 |
조부 | 이억(李億) | 1444년 - 1518년 | 성종 때 사헌부 장령 역임 |
조모 | 전주 최씨(全州崔氏) | 1444년 - 1509년 | 최유림(崔有臨)의 딸 |
부 | 이수견(李秀堅) | 1464년 - 1532년 | 중종 때 사헌부 집의 역임 |
모 | 청송 심씨(淸松沈氏) | 1464년 - 1522년 | 심원(沈湲)의 딸 |
본처 | 풍천 임씨(豐川任氏) | 1503년 - 1556년 | 임내신(任鼐臣)의 딸, 4월 과천 청계에 안장되었다가 12월 이감의 묘 왼쪽에 합장 |
후처 | 예천 윤씨(醴泉尹氏) (예산 윤씨(禮山尹氏)) | 생몰년 미상 | 선영 아래 동록(同麓) 계좌(癸坐)에 매장, 2017년 이감의 묘소 이장 시 합장 |
아들 | 이성헌(李成憲) | 1534년 - ? | 서인의 공격을 받아 파직과 복관을 반복 |
사위 | 김대명(金大鳴) | 생몰년 미상 | 안동인 |
사위 | 최영세(崔永世) | 생몰년 미상 | 삭녕인 |
사위 | 권진(權縉) | 생몰년 미상 | 안동인 |
사위 | 임혼(任渾) | 생몰년 미상 | 풍천인 |
손자 | 이경항(李慶恒) | 생몰년 미상 | |
손자 | 이경복(李慶復) | 생몰년 미상 | |
손자 | 이경진(李慶晉) | 생몰년 미상 | |
손자 | 이경관(李慶觀) | 생몰년 미상 | |
손자 | 이경엄(李慶嚴) | 생몰년 미상 | |
외손자 | 김시회(金時晦) | 생몰년 미상 | |
외손자 | 김시망(金時望) | 생몰년 미상 | |
외손자 | 김시경(金時憬) | 생몰년 미상 | |
외손자 | 김시혼(金時暈) | 생몰년 미상 | |
외손자 | 최후량(崔後亮) | 생몰년 미상 | |
외손자 | 권심(權심) | 생몰년 미상 | |
외손자 | 권념(權념) | 생몰년 미상 | |
외손자 | 권지(權지) | 생몰년 미상 | |
외손자 | 임회(任晦) | 생몰년 미상 | |
증손 | 이서우(李瑞雨) | 1633년 - 1709년 | 호는 송곡(松谷), 영정각에 배향 |
2017년 8월 경기도 성남시 분당구 대장동 산 19번지에서 강원도 원주시 부론면 단강1리 산77번지 작실로 이장, 부인 풍천임씨와 계비 혹은 부실인 예천윤씨(예산 윤씨)와 합장되었다.[1]
4. 작품
그의 문집과 작품은 대부분 실전되었다. 현존하는 작품으로는 시 몇 수와 8대조 이억의 묘갈명 등이 남아 있다. 미암 유희춘 등에게 증정한 시가 있어 유희춘이 답시를 준 것은 현재 전하나, 그가 준 시는 전하지 않는다.[18] 신광한의 기재집에 의하면 1550년 당시 비변사 계회도를 몇 장 그렸다고 하나, 현재 전하지 않는다.
- 8대조 가정대부 중추원부사 겸 의흥친군위동절제사 이억 묘갈명
- 비변사계회도 (備邊司契會圖)
5. 시
사림파와 사이가 좋지 않았으며 이량의 몰락 이후 윤원형 일파 역시 몰락하면서 그는 사림파로부터 비판의 대상이 되었다.[1] 명종 때 경상도관찰사로 소수서원에 들러 경렴정에서 읊은 시는 다음과 같다.[1]
6. 평가와 비판
이감은 사림파와 대립하였고, 이량의 몰락 이후 사림파로부터 많은 비판을 받았다. 그는 권력 투쟁에 몰두하여 백성들의 삶을 제대로 돌보지 못했다는 평가를 받는다.[18] 또한, 이감의 행적은 붕당 정치의 폐해를 보여주는 사례로 언급되기도 한다. 그의 권력 남용과 정치적 행보는 조선 중기 정치 상황의 모순과 한계를 드러내는 것이었다는 비판이 있다.
참조
[1]
문헌
오자로 이감(李勘)으로 기록된 문헌
[2]
기타
[3]
기타
[4]
실록
양사가 박한종의 관작 삭탈 등 화재에 관한 일을 아뢰다
1553-09-18
[5]
실록
분견 어사들을 인견하고 백성을 잘 구휼하라고 하다
1548-02-08
[6]
간행물
題備邊司契會圖竝序
[7]
실록
영의정 심연원 등이 서얼 방금법 등에 대해 의논한 법 개정을 결정하다
1553-10-07
[8]
비문
정대년신도비명
[9]
실록
사정전에서 심연원 등을 인견하여 달량의 왜변에 대한 방책을 듣다
1555-05-16
[10]
일기
당(堂)에 머물렀다 (留堂)
1555-05-26
[11]
일기
아이를 돌보며 당(堂)에서 잤다 (宿堂護兒)
1559-04-05
[12]
서적
퇴계 선생(退溪先生) 언행록(言行錄)
[13]
실록
경기 관찰사 이감이 배사하니 여러 고을에 신칙하여 구황에 전력할 것을 명하다
1561-04-26
[14]
실록
이감과 이관의 파직을 윤허하지 않다
1561-05-22
[15]
서적
퇴계 선생(退溪先生) 언행록(言行錄)
[16]
실록
양사에서 이양·이감·권신 등을 멀리 귀양 보낼 것을 청하다
1563-08-20
[17]
웹사이트
http://e-kyujanggak.[...]
[18]
기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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